윤동주 시모음
윤동주(1917–1945) 시인은 식민지기의 억압과 검열 속에서도 거창한 구호보다 ‘부끄러움’과 ‘양심’이라는 내면 윤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별·바람·눈·풀·봄 같은 미세하고 투명한 자연 이미지를 통해 시대의 어두운 공기를 정화하듯 걸러낸 시 세계를 남기셨습니다. 본 글은 윤동주 시인에 시모음입니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역사 서사를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도, 작고 맑은 사물의 감각을 통해 기억·그리움·자기성찰·재생을 순환시키는 독특한 윤리적 서정 구조를 형성합니다.
윤동주 시 세계의 기본 결
- 윤리 중심: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자기 규율이 창작의 근골을 이룹니다.
- 자연 모티프의 기능: 별(기억 저장), 바람(양심 감도), 눈(상실과 덮음, 동시에 재생 약속), 풀·봄(회복), 우물(자기 응시), 길(실천적 결의).
- 정서 파동: 미움 → 연민 →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내면 순환이 죄책과 희망 사이 균형을 유지합니다.
- 언어 전략: 간결한 단문, 반복 구조, 나열과 호명, 감각적 이미지의 층위적 병치로 의미를 과잉 서술 없이 심화합니다.
1.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감상: ‘부끄럼 없음’이라는 윤리 좌표를 삶의 종결 시점까지 확장한 선언적 서정입니다. 미세한 ‘잎새의 바람’에도 양심이 흔들리는 예민함을 통해 시대 억압을 외부가 아닌 내면 감도 유지로 저항합니다. 마지막 행은 결의의 지속을 열어 둔 열린 현재형입니다.
2.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감상: 우물은 다층 반사 매체로 ‘자기→타자화→재동일화’ 정서 회로를 시각화합니다. 자연 배경 반복은 감정 파동과 대비되어 자아 기억을 ‘추억처럼’ 고정합니다.
3.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감상: 별은 추억·사랑·쓸쓸함 등을 담는 데이터 컨테이너입니다. ‘별 하나에~’ 나열은 정서를 분류·보존하는 호명 의식이며, 이름을 묻는 행위는 겸허한 자기 비움과 미래 재생(풀이 무성할 것) 예비입니다.
4.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
감상: 생활 구체(학비 봉투)와 ‘슬픈 천명’의 마찰이 시적 긴장을 만듭니다. ‘침전’ 이미지는 폭발적 분노 대신 느린 자기 정제를 표상하여 윤동주 서정의 저소음 저항 방식을 드러냅니다.
5.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이고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감상: 동일 반복 구문이 ‘습관화된 결의’를 형성합니다. 새로움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반복 속 의지 갱신에 있습니다.
6.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엣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뚜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감상: 꽃–인물–화자 감정 동일화로 기억과 현재 정서가 동시점에서 재결합합니다. 순정성이 반복으로 강화됩니다.
7.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 하는 오후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감상: 일상의 미시 장면을 정지시켜 청정한 평온을 확보합니다. 소소한 생활성 자체가 억압된 시대의 심리적 회복실이 되고, ‘햇발의 초점화’가 정화 감각을 강화합니다.
8.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감상: 계절–신체 결합 은유를 통해 내부 생명력이 시간의 억압을 뚫고 ‘풀포기’처럼 겸허하지만 확실하게 재생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9. 눈 오는 지도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힌다.방(房)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이나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一年)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감상: 눈은 이별 흔적 지우기(덮음)와 추후 재생(꽃) 약속을 동시에 지닌 이중 기호입니다. ‘연중 내리는 마음 속 눈’은 지속적 애도의 기후를 형성합니다.
10. 슬픈 인연 (비정본 주석)
단, 단 한번의 눈마주침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슬픔은 시작되었습니다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못본체 했고,
사랑하면서도 지나쳤으니
서로의 가슴의 넓은 호수는
더욱 공허합니다자신의 초라함을 알면서도
사랑은 멈출 줄을 몰랐고,
서로가 곁에 없음을 알면서도
눈물은 그칠줄을 몰랐습니다이제, 서로가 한 발씩 물러나
눈물을 흘릴 줄 압니다이들을 우린
슬픈 인연이라 합니다.
감상: 단회적 시선 교차에서 시작된 비완결 사랑의 감정 관성을 간결한 진술로 정렬합니다. ‘알면서도’ 구조가 인지와 정서 불일치의 지속을 드러냅니다.
11.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감상: 눈(차갑고 하얀 감각)을 문자 이전의 메시지로 전환하여 순수 정서 직접 전달을 꿈꾸는 시입니다. 형식(글씨·우표)을 제거해 매개를 최소화한 절대적 그리움의 투명성을 확보합니다.
결론
윤동주 시는 작은 자연 이미지들을 양심과 기억의 연산 장치로 전환하여, 직접적 구호 없이도 시대적 어둠을 통과하는 ‘저항의 투명성’을 구현합니다. 반복·호명·절제·미시 감각이 결합한 이 서정 구조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자기 성찰과 정서 재생의 실용적 모델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시편을 상호 참조적으로 읽으실 때, 각 작품은 더 이상 고립된 단편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망(Reflective Network) 으로 의미 깊이를 증폭시키며,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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